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태엽 시계(장난감) 원리, 아날로그 시계 분해

2024-04-03-수 수정

태엽 시계와 태엽 장난감은 같은 원리로 동작한다. 고로 시계를 이해하면 태엽 장난감을 만들 수 있다. 아니 다른 기계도 만들 수 있다.


1. 동력원


쉽게 만들 수 있는 시계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은 물론 해시계이다. 해시계는 해가 떴을 때만 동작하고 기계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물시계부터 보자. 에너지를 공급하는 동력원이 필요한데 물시계는 물레방아와 같은 수력을 이용한다. 기계 시계는 태엽을 동력원으로 한다.

자연에서 힘을 얻는 물레방아의 경우 홍수가 나면 에너지가 넘치는 문제가 있다. 바람 방향에 무관하게 동작하는 풍차는 풍속계와 원리가 같다. 문제는 바람의 세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힘을 일정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다. 물 시계의 경우 물 높이를 일정하게 하고 구멍 크기를 일정하게 뚫으면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의 물이 빠져 나온다.

태엽이 없던 시절에는 중력을 이용해서 동력을 공급 받았다. 아주 무거운 추를 밧줄에 매달아 태엽처럼 감았다. 추의 무게는 무겁게 하고 추의 낙하 거리를 짧게 하기 위해서 도르래를 사용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 높은 곳에 추를 매달아야 한다.

도르래도 지렛대와 비슷하게 힘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힘의 세기와 당기는 거리를 조절하기도 한다. 중력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일정하게 공급된다. 우린 태엽 대신에 고무줄이 있으니까. 고무줄을 태엽처럼 감으면 된다. 문제는 일정한 속도로 에너지가 방출 되게 해야 하는 거지.


2. 일정한 속도로 제어 = 탈진기(escapement)


시계에선 시간에 맞추어 정확하게 힘을 제어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힘을 제어하지 않으면 한 번에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가게 된다. 힘을 제어하는 원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계속 떨어지면 가속도가 붙어 속력이 점점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계단이 있다면 속도는 다시 0부터 시작하여 일정하게 떨어지게 된다. 이 기능을 해 주는 것이 탈진기이다. 탈진기는 방아쇠와 같은 원리고 방아쇠는 지렛대의 원리다.





탈진기는 Y자 모양의 지렛대이다. 이게 힘을 내는 톱니가 돌면 좌우에서 번갈아 양팔로 협공해서 톱니를 잠시 멈춘다. 자세히 보면 톱니의 모양이 비대칭이라서 왼쪽, 오른쪽에서 멈추었을 때 상황이 좀 달라진다. 탈진기 스스로가 가진 진동 에너지는 마찰로 소모되게 된다. 계속 진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너지를 공급하는 톱니가 탈진기의 Y 지렛대를 밀어 줘야 한다. 탈진기 스스로의 진동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에너지 공급 톱니가 오른 팔을 살짝 밀어주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때 Y 지렛대는 다시 에너지 공급을 받아 왼 팔로 톱니를 멈추게 된다. 이 짓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는 기능은 진자가 담당했다. 진자의 길이가 일정하면 진폭이 어떠하든 중력에 의해 항상 일정한 시간으로 왔다 갔다 한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는 정밀하게 만들어진 태엽(balance wheel = 평형 바퀴)이 담당한다. 태엽이 감겼다가 풀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이 태엽의 진동 시간을 정밀하게 맞추어야 정확한 시계가 되는 것이다. 균형 바퀴의 무게와 태엽 탄력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정밀 기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균형 바퀴와 태엽의 공진 주파수는 1초와 일치하게 된다.

물시계의 경우는 일정한 수압을 이용한다. 일정한 크기의 통에 항상 물이 가득 차게 한다. 넘치는 물은 버려진다. 가득 찬 통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항상 일정한 수압으로 물이 빠져 나온다. 이 물을 지렛대 끝의 작은 그릇에 받아 담는다. 그릇이 가득 차면 지렛대를 움직여서 톱니를 돌게 한다. 지렛대가 기울면 물이 빠져나가면서 중력에 의해 다시 균형을 잡게 되어 톱니를 멈추게 한다. 일정한 수압 유지와 그릇의 크기가 정밀해야 한다.


3. 표시 장치


핵심적인 부분은 다 됐고 나머지는 기어 비가 다른 톱니를 돌려 시, 분, 초를 표시하거나 종을 치거나 하는 부분이다. 여기선 원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바꾸는 크랭크나 비대칭 타원형인 캠 같은 것도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시계, 장난감이 구분된다. 시계 바늘을 움직이면 시계, 팔다리를 움직이면 로봇, 바퀴를 움직이면 자동차인 것이다.



4. 시계 분해


옆집에서 버린 시계 하나를 주어 와서 분해하였다. 순서는 이렇다.

  1. 일단 껍질을 벗긴다.
  2. 그리고 바늘을 뺀다. 초침 → 분침 → 시침 순서다.
  3. 그리고 중앙에 나사가 있는데 이걸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다.
  4. 시계 뒤쪽의 사각형 모양의 시계(기계)가 앞 시간 표시 판과 분리 된다. 



검정 사각형 시계 상자를 분해하는 순서이다.

  1. 시계 바늘 쪽(검정색)을 하늘 쪽으로 놓고 벗긴다. (아님 반대로 하는 것인가?)
  2. 그러면 톱니가 있는 쪽(투명)이 바닥에 얌전하게 놓인다. (반대로 해 봐라)
  3. 그 상태를 사진 촬영한 후에 톱니를 분해한다.




좀 더 확대해서 관찰해 보면 톱니가 하는 일이 뻔하다. 60 vs 1로 초침의 속도를 떨어뜨려 분침, 시침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단 시간 조절을 할 때는 초침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바로 분침에 사람의 힘이 영향을 주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자세히 관찰하면 알게 된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날로그 시계도 기계식 시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자시계이다. (당연! 건전지 봤잖아!) 전자 회로 부품이 진동을 일으키는 주파수를 이용해서 기계식보다 더 정확하게 초침을 돌린다. 이 톱니와 바늘 대신에 숫자를 표시하면 디지털 시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 digit = 0~9 문자 10개

위의 그림이 너무 복잡해서 다른 중국산 시계를 하나 더 분해했는데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원리 파악이 더 쉬울 거 같다.











정치 쪽에선 상식이라고 한다. 중도란 없다는 말이 있다. 좌우 대립이든, 과학과 미신의 대립이든, 민주와 독재의 대립이든 중도 층이란 없다는 말이다. 만약 10개의 문제를 내서 좌우(선악) 중에서 하나의 답을 선택하게 할 경우 10점은 극좌, 7~9점은 좌파, 0점은 극우, 1~3점은 우파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중간의 4~6점짜리는 어느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 문제에 대해선 좌우 선택이 명확하지만 전체 점수로 보면 중도로 보인다. 이런 층을 어리버리 층이라고도 하는데 정보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50점만 맞은 경우이다. 이런 어리버리 층은 좌우 쪽에서 협공을 당한다. 그래서 세상은 10%의 우파(부자)와 10%의 좌파(거지)가 80%의 멍청이들을 좌우 협공하여 협박 유혹하는 것이다.

이치를 따지면 대부분이 좌파 쪽에 서야 유리함에도 좌우가 반반인 현실은 바로 세뇌 교육, 언론 선동으로 인한 정확한 정보 부족에 따른 판단 오류 때문이다. 중도란 말은 멍청이란 말과 같다. 재산/소득 평균을 기준으로 잡을 경우 평균 이상은 상위 10~20% 수준에 해당한다. 80~90%는 평균 이하란 얘기이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거지.

메타인지(상위인지)란 '자기 자신이 인지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 즉 '자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를 안다'는 의미
메타(영어: meta-, 그리스어: μετά→ "뒤", "넘어서", "와 함께", "접하여", "스스로")는 영어의 접두사로, 다른 개념으로부터의 추상화를 가리키며 후자를 완성하거나 추가하는 데에 쓰인다. 인식론에서 접두사 meta는 "~에 대해서"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단어의 뜻을 보면 뭔가 모순적인 설명이 있음을 알 것이다. 간단하게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단 것과 모르고 있단 것을 알게 되는 때는 자신보다 모르는 자, 자신보다 아는 자를 만났을 때이다. 아니면 어떤 문제를 접하고 그걸 해결하려고 할 때 느낀다. 해결했을 때 "알았다!" 해결이 안 될 때 "모르는구나!"라고 느낀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은 자기가 어떤 문제를 잘 풀고, 어떤 문제를 못 푸는지 알고 있다. 즉 뭘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자기가 지금은 모르지만 공부할 게 있다는 건 안다. 공부 못 하는 친구들은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사이비 종교나 사이비 정당(극우/극좌)이나 사기꾼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털리고 나서야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안다고? 대부분 그걸 모르고 산다.

바보는 자신이 바보임을 모른다. 미친 자도 자신이 미친 것을 모른다. 무식한 자도 자신이 무식한 걸 모르고 살 수 있다. 어린 학생은 자신의 답이 틀렸을 때 뭔가 잘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인공 지능의 기계 학습도 마찬가지 원리다. 정답과 오답을 인간이 알려 준다. 전혀 다른 것을 접하고 비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길로 가야 함을 알게 된다. 독재 국가 안에 갇혀 세뇌 교육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이 틀린 것을 모른다. 밖에 나가서 세계 사람들과 만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이 이긴 걸 아르헨티나 국민만 모르고 있었다. 독재 정부와 언론이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독재 시대 협력하던 언론들 아직도 남아 있잖아?

이재명을 죽이려 했던 그 꼴통 노인은 떼국기 부대라는 가짜 극우 단체 소속이고, 사이비 종교인 쩐광인 목사에게서 평소 빨갱이(극좌)에 대한 살인 충동(빨갱이는 죽여도 좋다!)을 가지도록 선동 당했고, 이 가짜 목사는 사이비 정당인 국민짐 당원이다. 사이비 언론인 좃충똥과 극우 유튜버의 거짓 선전에 속아 이재명을 빨갱이(극좌)로 오해하고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 꼴통 노인은 공산주의는 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끝났고, 더 이상 공산 혁명을 지원할 국가가 이제 없다는 걸 모른다. 북한도 헌법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했다. 러시아에선 공산당이 야당이다. 중국은 자본주의 독재 국가이다. 진짜 빨갱이는 전향해서 국민짐에 가 있다. 빨갱이가 없는데 빨갱이 사냥을 한다고 그 바보 짓을 한 것이다. 숫자가 틀리면 계산이 정확해도 답이 틀리는 거다. 전제 조건이 되는 사실을 확인 안 하면, 논리적인 거짓말만 남을 뿐이다.

광화문에 놀러 가면 가짜 극우 단체인 떼국기 부대에서 "빨갱이 죽여도 좋다!" 하는 소리를 실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진짜 죽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데, 일부 깊이 빠진 자들은 진짜로 죽이려고 한다. 누굴? 지가 빨갱이라고 오해하는 자를! 진짜 빨갱이라 하더라도 죽이면 안 되는 게 법이고 세상 상식이다. 사상과 종교의 자유 몰라? 빨갱이는 한국, 미국, 일본에서도 합법이다. 일본에선 공산당이 의석도 차지하고 있다. 범법 행위를 해야 처벌하는 거다. 대부분의 테러범들이 이런 삐딱한 믿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란 것이다. 마치 정상인지만 사이비 종교나 사기에 빠진 사람들 있잖아? 대화해 보면 알 것이다. 말이 안 통한다. 이게 믿음의 힘이란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것(신/영혼/저승 등) 또는 증명되지 않은 것(외계인/빨갱이/간첩 등)을 믿는 자가 가장 위험한 자이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자를 피하라.



진정한 중도는 극좌와 극우 모두를 아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개소리다. 양쪽 모두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또는 좋아하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중도란 사람들은 양쪽 모두 잘 모른다. 우리나라에선 그런 교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좌가 뭔지, 극우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학교에서 법, 정치, 사상, 종교에 대해서 안 가르치잖아? 그래서 중도층은 어리버리층이다. 중도를 어떤 당도 지지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사안에 대해 어느 한 순간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평생 투표할 일 없겠지? 투표하는 순간 이미 중도는 아니다. 진정으로 잘 모르겠다면 투표하지 마라. 그런데 잘 몰라도 다들 투표 잘 하잖아? 설마 투표장에 가서 나는 기권이요 하고 이상한 곳에 도장 찍는 건 아니겠지? 집에서 놀지 왜 그런 짓을 하지?

지금 여기서 양쪽 군대 중에 어느 편에 항복해야만 한다면? 여기서 중도란 뭐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잘 못 항복하면 학살 당하는데? 정답을 아는 자는 확실하게 선택한다. 아는 자에겐 중도가 가장 어려운 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중도라고 할 수도 있다. 일단 어느 편에도 해롭진 않잖아? 그러나 아무 편도 안 들면,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과 아이들까지 학살했던 게 현실이다. 중도라고 해서 살려 주진 않는다. 노인 세대가 빨갱이란 말만 나오면 기겁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있어도 빨갱이라 모함 당하기 때문에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옆 집 아무나 보고 빨갱이라고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나 말고 쟤 잡아 가요!" 하는 게 노인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중도도 아닌 확실하게 미친 "꼴통 보수입니다" 하는 거지. 학살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이다.



단어의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 아주 쉬운 단어의 뜻조차도 다르게 해석한다. 이유는 단어 뜻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거나 사전에서 찾아 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느낌으로 배우는 게 단어의 뜻이다. 진리와 진실은 하나인가? 이공계 사람들은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인문계 사람들은 여럿이라고 할 것이다. 왜 그럴까?

진리 (眞理) [질―]  【명사】① 참된 이치. 참된 도리. (자연 법칙?) ②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인식의 내용. (상식?) 
진실 (眞實)  【명사】【~하다 → 형용사】【~히 → 부사】거짓이 없고 참됨. (뭐가?)

사ː실 (事實) 【명사】① 실제로 있었던 일. 또는 현재에 있는 일. ② ⦗철⦘ 자연계의 객관적 현상. ③ ⦗법⦘ 일정한 법률 효과를 발생·변경·소멸시키는 원인이 되는 사물의 관계. (사실 = 진짜 사실 = 진실?)


진리, 진실, 사실 같은 단어를 들었을 때 뭐가 먼저 생각이 나는가? 이공계는 자연 법칙이나 카메라에 찍힌 사실(물증) 등을 생각할 것이다. 인문계는 상식(다수의 인식)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이 그렇게 믿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게 진리나 진실은 아니라는 게 이공계 스타일이다. 즉 객관성(증명)을 중요하게 본다. 여기서 객관성이란 단어의 의미도 인문계는 달리 이해한다. 다수결(다수의 인식)을 객관성으로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 뜻에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공계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높다. 인문계는 그 이해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자기 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위 여부를 잘 모른다. 진위 여부를 모르는데 어떻게 진리, 진실이라 말 하는가? 이공계는 속이 뒤집어진다. 보면 몰라? 인문계 쪽의 단어 의미는 경계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주관적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적인가? 거짓인지 모르고 진실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진실을 말 한 것인가? 사람이 진실한 것과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주관 (主觀) 【명사】①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 ② ⦗철⦘ 외부 세계 및 그 밖의 객체를 의식하는 자아. (내 생각, 내 맘이야 = 주인 관점) 

객관 (客觀) [―꽌] 【명사】① ⦗철⦘ 주관 작용의 대상이 되는 것. 또는 인식 주관에 대한 인식 내용. ②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사실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생각하는 것. (자연계, 손님 관점 = 다수의 관점)

6하 원칙 중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왜?"이다. 이건 사람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 당사자만 알고 있다. 보통 이 목적, 이유에 해당하는 것을 말 할 때 진실이란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진실이란 단어는 사람의 마음, 언행에 대해서 쓴다. 그러나 때론 "진짜 사실"이란 뜻으로도 쓴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누구, 무엇, 언제, 어디, 어떻게"에 해당하는 건 사실이란 단어를 쓴다. 그러나 한국어 문법으로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라서 섞어 사용한다. 논리적으로 진실도 하나여야 말이 되지만, 뻔뻔하게도 진실은 여러 개라고 말들을 한다. 진실(사람 마음)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겠지. 또는 증인들이 오해를 하여 잘 못 인식했거나 기억 왜곡으로 틀린 경우이다. 한자 단어 뜻으로 보면 진실은 진짜 사실이란 의미다. 진실한 사람이란 표현보다는 정직한 사람이나 솔직한 사람이 더 맞는 표현이다. 진실은 한자 뜻으로 보면 진짜 열매란 의미다.

※ 정직(正直) = 바르고 곧다, 솔직(率直) = 곧음을 따르다. 둘 다 성격이 직선적이란 의미다.

중도란 단어에도 여러 뜻이 있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출발지와 종착지 길 중에 가운데란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중도란 아직 길을 다 못 간,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한 배우는 사람이란 의미다. 도중과 중도는 같은 글자인데 어순만 바꾼 것이다. 도중이란 길을 가고 있는 중이란 의미고, 중도란 가운데 길이란 의미다. 어순이 달라도 같은 의미인 한자어가 있고, 어순이 달라지면 뜻도 달라지는 한자어도 있다. 중국어와 한국어 어순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도ː중 (道中) 【명사】 길 가운데. 노중(路中).
중도 (中道) 【명사】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 (선악을 두루 알라?) ② 중로(中路)1.③ ⦗불⦘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 진실의 도리. (있음도 없음도 아닌 중간이란? 애매모호함?) ④ ⦗불⦘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行法). (이건 맞는 말이네)

또 다른 뜻으로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가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좌나 우로 치우칠 수 있다. 또 다른 뜻으로는 3 갈래 길 중에 가운데 길을 말 하기도 한다. 이 경우 어느 한 길로 들어가면 다른 길로 바꾸기 힘들다. 그래서 추상적 개념의 단어의 뜻을 이해할 때는 문맥을 봐야 하는 것이다. 본인이 중도라고 말 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그건 중도란 단어보단 그 옆에 함께 쓰인 다른 단어들이 말을 해 준다. 양쪽을 다 아는데 줄타기 하는 걸 중도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잘 몰라서 선택 못 하는 것을 중도라 생각하는 건가?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일에 정답이 있던데 어떻게 중도가 있을 수 있지?

댓글 2개:

  1. 나름 문제의 근원적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다
    삼천포로 빠져 버리네.
    결론적으로 말하는 그 중도라는 자들은
    가짜 중도 개되지,좀비,노예들이지
    진짜 중도가 아니 여.
    그리고 그 중도라는 구분도 누군가에 의해
    구분되어진 거지
    그들 스스로 중도로 구분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단 여야 진,보수 좌우 등등의 성향으로
    사람들을 나누기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글러 먹은 거여.

    태어날 때 좌우 진,보수 여야 극우가 어디 있나?
    다 성장하면서 어디선가 뭔가에 의해
    가스라이팅 세뇌 된 거지.
    그리고 어느 쪽 이든 저렇게 나눠야
    뭔가 유리 한자들이 저런 짖 거리를 하고 있지.

    진짜 중도는 스스로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여
    내면의 순수 이성의 자아를 찾아
    스스로의 주인이 먼저 되고
    자신을 사랑하며(그렇다고 나르시즘은 아니고)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적 본질과 핵심을 보려 하고
    인류 보편적 세계관의 잣대로 판단하지.
    물론 사람이니 완벽하지는 않다는 걸 잘 알지.

    결국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적이고 본질적 핵심은
    사악한 짐승적 욕심의 탐진치 임을 알지.
    그리고 결국 자신도 그 욕심의 탐진치에 의해
    많이 좌우됨을 알고 안다는 것을 알고
    모름을 모른다는 것도 안다는 것 뿐이야.
    그리고 자신은 인간이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아
    이게 진짜 중도다.

    하여 진짜 중도는
    누군가 필요에 의하여
    저런 식으로 구축해 놓은
    시스템에 들어가기를 싫어하고 거부하지만
    현 시대 사회 상황이 그러니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척하고 위선을 떨지.
    그리고 본인이 위선 떨고 있음을 알고
    안다는 것을 알지.
    사람들을 보편적이지도 않은 잣대로
    나누기 하는 것 싫어하지만
    굳이 나누기 하려면 인류 보편적 잣대를 들이대고
    사람의 도리 양심 도덕을 아는 진짜 사람과
    짐승적 탐진치 욕심 만을 추구하는
    사람 탈을 쓴 짐승과의 나누기는 꼭 필요하다.

    결국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비양심의 탐진치 추구를 감추고자
    민주 법치 제도 시스템이니
    여,야 좌,우 진보수니
    지역 세대 계층 젠더 등등과
    사상이념 힘의논리 진영논리
    흑백논리 패권논리 등등에 투영하여
    위선 떠는 거 아닌가?

    더불어 나도 이사회에 살기에
    그 개되지,좀비,노예 중 한 마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알고 있음을 알고 있지.
    아는 걸 안다고 알고 있고
    모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아는 것
    이게 깨어있음이다.

    그리하여 양심으로 깨어있는 시민들이 모여
    조직되지 않은 조직의 힘이 필요하고
    그 깨어있는 양심들이 모여 행동하는 양심을 보일 때
    사람이 먼저 우선 되는 것이 여.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먼저 돼야 하지.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행동하는 양심,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여

    상기한 저 모든 걸
    좀 고급스런 표현으로는 메타인지라 하지.
    님 들은 너무나 고결하고 고귀해서
    잘 모르겠지만....
    고로 틀림없이 C-8 뭔 개소리야?할 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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